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원리의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안에서 복된 삶,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잘 믿고 성실하게 살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언급되어 있는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분명히 기독교는 복의 종교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의 근원이었습니다. 기독교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에게서 복은 그리 중요한 개념이 아닐지 모르지만,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복은 매우 근본적인 삶의 원리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잘 믿으면 고난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충대충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상관이 없지만,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하면 할수록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있습니다. 본 회퍼라는 신학자가 <나를 따르라>는 책에서 십자가의 고난없이 영광만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소중한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듯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고난을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적인 가치관은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적인 가치관과 대립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들조차도 세상과 대립각을 세우려 하지 않아서 그 영적인 능력을 잃어가고 있지만, 진정한 믿음은 물질주의적인 세상과 대립된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가운데 발휘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요, 세속적인 가치관에 대립각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 영성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진정한 제자의 길임을 천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 시대의 삶의 방식과 매우 다른 삶의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자율성과 자기 성취입니다. 인간의 자아가 강조되고, 무엇인가를 도전하고 성취하는 것이 우리 시대가 추구하고 있는 인간상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과시하고, 자신의 능력을 돋보이려고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재력이나 권력 그리고 지적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요즘은 외적인 미모나 몸매를 통해서 자신의 과시욕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심지어는 자식들까지도 자기 과시의 수단이 됩니다.

요즘 사람들은 무엇인가 남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짐으로써 자신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명품을 찾는 것입니다. 수개월 동안 월급을 모아 명품 가방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과시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힘과 실력 과시를 통해 남들보다 우월한 상태에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그 사람의 신경 시스템에 쾌락을 느끼게 해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어서 사람들이 인정을 받게 되면 마음속에서 큰 쾌락과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중독 현상처럼. 이것이 인간 본성의 실체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싶어하는데,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끊임없이 자기 과시를 부추기는 소비사회에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현대 심리학은 자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건강한 자아를 갖지 못하면 불행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용납할 수 있기 때문에 일면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기를 수용하는 행위는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건강한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지나치게 종교적이고 희생만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면 머뭇거립니다. 왠지 내 인생이 없어질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고난이고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그러고 보니 희생은 생명의 법칙입니다. 아무런 희생을 전제하지 않는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법칙이란 것이 본시부터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유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죽어야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공동체가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들의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결국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다른 이웃들과 피조물들과 함께 살기 위하여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 제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또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 곧 사는 길이라는 역설을 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 부인의 영성을 가르치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나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 없는 자기 부인은 진정한 자기 부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의 영성 없이는 자기 부인의 영성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에는 우리가 짊어져야할 고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속에서 더 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영성과 이상을 추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기 않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수 없고, 현실 너머에 있는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영적인 이상을 추구하며 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모든 사람에게 부여된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영성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자기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만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이 말씀을 진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언제나 역설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 생명이 있고, 십자가를 질 때 쉼이 있고, 자기를 내어줄 때 위로를 얻기 때문입니다. 주는 자가 복되다는 말은 주어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온천하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불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천하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은 자기의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 참 생명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불가능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될 때 우리는 자기 부인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기 부인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게 하는 삶, 그것이 곧 자기 부인의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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