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선 목사(어지니 교회)


교회의 지도자 자리는 엄중할 뿐 아니라 매우 어려운 자리다. 권위가 있어야 하면서도 권위를 내세우거나 권위에 함몰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지도자는 항상 긴장 상태에 있어야 한다. 때로는 권위를 내세울 수 있어야 하지만, 언제든 그 권위를 포기하고 기꺼이 이방인 노예의 자리로 내려갈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성직자 계급의 등장은 그러한 그리스도인 지도자의 긴장 상태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성직자를 권위적인 세상의 대인들로 만들었다. 그것은 본질의 상실이다. 하나님 나라는 권위가 없는 곳이다. 권위가 상존하는 곳에 하나님 나라는 임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교회의 이야기는 통찰을 제공한다. 그들에게 주교라는 확고한 자리가 있었다. 그러나 주교의 역할은 언제나 가변적이었고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수시로 발생했다. 

생각처럼 쉽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으시기 위해 그를 산산조각 내셔야 했다. 산산이 부서진 베드로는 비로소 주님의 교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반석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초기 교회의 지도자는 베드로와 같이 타인에게 이끌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가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상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우리는 베드로가 교회의 장로들에게 한 말에 주목해야 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우리는 이 말을 아무런 감동 없이 당연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말씀대로 실천해보라.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이 말씀을 실천하려는 자신이 문제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지도자의 자리에 앉아 보라.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오늘 그리스도인 지도자 이야기를 하는 것은 기사 하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돌나라’라는 브라질의 한국인 집단농장에서 다섯 명의 아이들이 죽었다. 정화조 설치 작업 중에 흙무더기가 무너져 다섯 명의 아이들이 죽었다. 그들은 '다섯 용사의 장례식'을 통해 '봉헌 예물을 올려드렸다'며 아이들의 죽음을 합리화했다. 아이들이 공동체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된 것이다. 돌나라 관계자는 “어린 자녀들의 희생의 피를 통해 돌나라가 똘똘 뭉치게 되었고 주님과 우리는 끊을 수 없는 더 끈끈하고 튼튼한 하나가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이 기사에서 대인이 된 지도자가 이끄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자화상을 본다. 그곳은 베드로 사도가 말하는, 주장하고 지배하려는 지도자가 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지도자가 지배하는 대인이 될 때 그곳에는 결코 하나님 나라가 임할 수 없다. 그곳은 능력주의가 주도하는 ‘희생 체제’가 될 수밖에 없다. 

 ‘돌나라’라는 한국인 집단농장을 이단이라고 매도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교라고 믿고 있는 교회들이 돌나라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세상의 집권자들과 같아졌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 베드로와 같이 맡은 사람들에게 이끌리는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의 모습을 확인한다. 

'그런데 만약 예배가 진행 중이고 주교가 말하고 있는데 다른  회중에 속한 남자나 여자가 늦게 도착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도들의 가르침』은 회원들에게 주교의 가르침이 가장 중요하며, 따라서 아무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그러니 어떤 유력한 평신도가 늦게 도착하더라도 주교의 가르침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그런 경우에는 한 형제가 그 부자를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만약 그를 위한 자리가 없다면 "자애롭고 선한 의지로 가득 찬" 그리고 예의 바른 한 형제가 자발적으로 일어나 자기의 자리를 내주고 자기는 그 곁에 서 있어야 한다. 주교는 그의 가르침을 늦추지 않으면서 이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만약 회중의 어느 젊은이가 자기의 자리를 내주지 않아 나이 든 남자나 여자가 계속해서 서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주교는 그 의무 태만자를 나무라서 부끄럽게 하고, 일어나 다른 사람들 뒤에 서 있게 해야 한다.'

이 이야기에서 주교는 분명 권위가 있다.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의무 태만자를 꾸짖을 수 있는 권위가 있다. 하지만 다음 이야기에서 주교는 그 권위를 내려놓는다. 

'만약 가난한 남자나 여자가 도착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같은 지역으로부터든 혹은 다른 회중으로부터든 가난에 찌든 어떤 이가 도착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이 나이가 많은데 자리가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는 감독이 예외적인 무언가를 해야 한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이렇게 명령한다.  주교는 설교를 멈추고, 그 가난한 이들에게 주교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한다. 주교는 충심으로 그들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땅바닥에 앉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공동체의 리더인 주교는 소란을 피워야 한다! 구체적인 예배를 통해 공동체의 확신을 예시하는 행동을 가르쳐야 한다. 그 확신이란, 교회 안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부자나 유력한 사람들을 특별하게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높인다는 것이다. 집회 안에서 사람들에 대한 존경(혹은 세속적 유력함에 대한 존경)이 있어서는 안 된다.'(380-381)

권위로 태만자를 꾸짖던 주교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특히 어떤 사람에게 권위를 내세우고,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부자에게는 엄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양보하는 이런 일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주교는 그렇게 맡은 사람들에게 모범이 된다.

심지어 가난한 자를 위해 설교를 멈추기까지 한다. 이것은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며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가난한 자가 곧 그리스도임을 그들의 행동을 통해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주교와 같은 지도자들이 바로 베드로와 같이 산산이 부서진 사람으로서 교회의 반석이다. 

오늘날 교회는 어떤 사람을  지도자로 선택하는가. 좋은 대학을 나온 박사 목사이거나 능력 있는 목사이다. 베드로와 정반대의 인물을 오늘날 교회는 선택하고 있다. 그들이 대인이 되어 교인들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슬픈 오늘날의 교회를 볼 수 있는 은혜가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임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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