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일 아이들먼은 그의 책 『거짓 신들의 전쟁』에서 현대인의 삶의 두드러진 특징을 우상숭배라고 말한다. 가족불안중독의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삶의 문제들과 죄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과 상담을 하면서 저자가 내린 결론은 모든 문제들의 배후에 항상 우상숭배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직면하는 죄의 문제는 수백 가지 다른 증상을 나타내지만 문제의 본질은 언제나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 삶에 산재해 있는 거짓 신들을 제대로 식별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그것들이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나쁜 것들로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오락, 스포츠, 돈, 섹스, 성공 등은 ‘가치중립적’이어서 그것 자체로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 삶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우상이 되기에, 교회 안에서도 우상숭배의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님 이외에 무엇인가를 삶의 목적으로 정하고, 희생을 감수할 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의 가치와 의미 및 정체성을 거기에 두려고 할 때, 그것은 우리가 섬기는 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예배를 드리지만 예배가 부수적인 것이 될 때, 기도를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보다 더 강력할 때, 찬양을 하지만 그 찬양 속에서 은혜와 감격이 사라질 때 우리는 우상숭배의 위험에 노출된다. 신을 섬기는 것은 인간 존재에 내재된 고유한 특질이기 때문에 신을 섬기는 현상은 모든 문명과 문화에 예외가 없으며, 심지어 인간의 유전자 암호에는 예배할 대상을 찾도록 유전자 정보가 기록되어져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지 예배할 대상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유신론의 반대는 무신론이 아니라 우상숭배다”라는 피터 크리프트의 말은 현대인의 문제를 예리하게 지적한다. 결국은 무엇을 섬길 것인가의 문제이지, 예배의 대상을 찾아 자신의 삶을 헌신하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은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섬기는 우상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무엇에 대해 실망하는가? 둘째, 무엇에 대해 불평하는가? 셋째, 무엇을 걱정하는가? 넷째, 무엇에 화를 내는가? 다섯째, 어디에 돈을 쓰는가? 여섯째, 당신의 피난처는 어디인가? 일곱째, 무엇을 꿈꾸는가?

무엇인가에 과도하게 실망하거나, 불평하거나, 걱정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그것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실례이다. 성경은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디에 무엇을 위해 돈을 쓰고 있는지 살펴보면 여러분의 우상이 무엇이지 알 수 있다. 마음의 상처를 받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즉시 전화통으로 달려가지 않는가? 여러분의 상처를 오직 사람을 통해서만 해결하려고 한다면, 의지하는 그 사람이 우상이 될 수 있다. 끝으로 그렇게도 열망하고 열정을 태웠던 것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 자신이 우상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우상은 우리 자신이다. 잠언서 4장 23절은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고 말한다.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세상 풍조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현대사회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성적 삶이다.

히브리서 13장 1-5절의 말씀에서 우상숭배에 반대되는 영적인 삶의 원리를 두 가지 묵상할 수 있다. 첫째는 사랑과 섬김의 삶이다. 1-3절은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잘하고, 복음으로 인해 학대 받은 자들을 생각하라”고 말한다. 사랑과 섬김의 삶은 우상 숭배하는 삶과 대조되는 삶의 방식이다. 사랑과 섬김은 믿음 안에서 열매 맺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는 탐욕과 이기적인 자아 성취를 추구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한 이타적인 마음을 바탕으로 하는 사랑과 섬김의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형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손님을 기쁨으로 대접하고,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자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지만, 예수 안에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들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이고, 초대 교회의 공동체적인 삶의 중심이었다.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제자됨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는 지상명령을 주셨고, 제자를 삼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형제 사랑을 지속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제자로 인정받아야 한다.

둘째, 예수 안에서 자족하는 삶이다, 히13장 5절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로 족한 줄 알라”라고 조언한다.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적용하기 가장 힘든 말씀이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해결하려고 한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말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일 뿐만 아니라 모든 우상의 뿌리하고 할 수 있다.

원래 돈은 가치중립적이어서 잘 사용하면 유익하지만, 그 만큼 우리를 가장 타락시키기 쉽다.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원수가 되고, 돈 때문에 저질스러워지고, 돈 때문에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 요즘 시대는 돈이 윤리와 도덕을 대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사회에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은 실행 불가능한 계명처럼 느껴지고,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치부된다. 우리 사회는 더 많이 가진 사람이 행복하다는 잘못된 신화에 사로잡혀 있다. 아무리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이라고 해도 늘 부족하다고 말한다. 아무리 많이 가져도 늘 부족한 것이 돈이기에 사람은 돈을 사랑하기 쉽다.

어떻게 이 세상에서 돈 없이도 불행하지 않게 살 수 있는가? 나 같은 죄인을 구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천국의 소망을 가질 때 가능하다. 실제로 자족의 경지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하다. 예수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을 맛 본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든 자족하고 감사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믿음의 최고의 경지는 예수 안에서 자족하는 삶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되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삶, 주어진 삶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자족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영적인 삶의 기초이다.

그런데 히브리서 13장 5절 말씀은 자족하라는 말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이 추가되어 있다.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고, 너를 결코 떠나지 아니 하리라.”그리스도인의 행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믿음이 축복의 통로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을 섬길 것이냐? 우상을 섬길 것이냐? 라고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현대적인 우상은 삶과 문화의 형태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이러한 유혹에 맞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방식을 지키며 살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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