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은 새로 태어난 인생의 설레는 모험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하고 믿음으로 이어집니다. 새해에 출발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얼마나 멋진 모험이 될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꿈을 크게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 54:2). 이스라엘이 부흥하려면 비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비전은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눈 입니다. 히브리 11장은 믿음의 비전을 가진 위인들을 소개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믿음으로 보았고 복종했습니다. 신앙의 모험에 네 가지가 필요합니다.하나님 사이즈로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 빌립보서 2장 13절 14절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성도 개인의 심령과, 공동체인 교회의 교제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크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목석같이 무심한 창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거하시며 착한 일을 하십니다."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바울 사도의 말입니다.
길을 가던 구레네 시몬이 구원의 드라마 한복판으로 끌려나와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이 경험으로 시몬의 삶이 변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지친 몸을 쉬게 해드렸고 갈보리로 올라가 마침내 참 생명의 근원에 이르렀습니다. 시골 신사 구레네 시몬시몬은 신실한 유대인이었습니다. 북아프리카 이민자의 후손인 시몬은 고국에 돌아와 예루살렘 근처 농촌에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건장하고 힘센 농부였습니다. 시몬은 볼일이 있어 길을 가던 중이었습니다. 십자가 행렬을 따라가는 무리와는 목적과 방향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뜻밖의 상황에 몰린 시
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 되심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사람을 이해하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사람됨을 이해하십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1). 예수님은 다 큰 어른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분이 아닙니다. 여인의 몸에서 아기로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되신 분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인자(人子)”라는 말이 스물 세 차례나 나옵니다. 예수님이 사람이시므로 사람인 우리를 이해하시는 것입니다.그러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이 말씀이 요한복음의 주제입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와 제자들이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마리아가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을 보면 친척집인 듯합니다(2:5).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준비가 미흡했던 것입니다. 잔치 음식이 모자란다는 것은 난처한 일입니다. 잔치가 형편없었다는 입소문이 나돌 것입니다. 모자라기만 한 세상에서 주님은 생명의 풍성이십니다.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표적들이 많이 나옵니다. 주님은 잔칫집에 기쁨을 되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성적 성품도 언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창세기 1:27 말씀에서 단서를 얻으셨을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은 완전하시므로 다양한 표현이 필요하다고 믿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천주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성의 원형으로 보고 신격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성의 구체적 본보기를 성경에서 보여 주십니다.어미닭과 같은 하나님(눅 13:34)예수님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셨고,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선지자가 예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전할 좋은 소식이 있습니까? 시련과 고난은 누구나 만나는 인생의 현실입니다. 불치병이 닥칩니다. 경제난이 엄습합니다. 불화가 가정을 파탄시킵니다. 인생길에 치명적 사고도 발생합니다. 모든 희망이 꺼져 버리는 막다른 골목도 만납니다. 그리스도인은 시련과 고난이 올 때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시련을 만나면 참고 바라며 신앙에 기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낙담 끝에 신앙을 버리거나 증오와 냉소로 신앙을 적대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시련과 어떻게 싸웁니까? 야단법석하고 악담을 퍼붓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며 아
허영진 목사유다는 유다 지방 가룟 마을 출신입니다. 제자 중 유일한 비 갈릴리인입니다. 이름은 민족 영웅 유다 마카비에게서 따왔을 것입니다. 그는 열렬한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유다는 이기적이고 과격한 야심가였습니다. 유다의 배신유다 말고도 배신자는 허다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동생을 배신했습니다. 아나니야 삽비라 부부도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역사에는 배신의 행렬이 끊이지 않습니다.주님은 끝까지 유다를 사랑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왼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오른손으로 식사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의 오른 쪽에
민족시인 이상화는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얼어붙은 민족 역사의 혹독한 겨울을 시로 읊었습니다. 그는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시제 아래, 고향 들판의 정겨움과 그리움을 숨이 막히도록 섬세하고 아름답게 그린 후 마지막 줄을 이렇게 맺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것네.” 그러나 성경 아가서의 시인은 이미 겨울은 갔다며, 꽃 피고 새 우는 사랑과 평화의 봄 동산으로 오라고 우리를 부릅니다. 성경은 차갑게 얼어붙은 우리의 겨울 방문을 두드리는 봄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허영진 목사가정도 병이 듭니다. 병든 가정의 치유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병든 가정도 치유와 회복이 가능합니다. 성경이 건강한 가정생활을 위하여 알아야 할 몇 가지 진리를 가르쳐 줍니다.건강한 가정은 선택의 결과입니다(마 7:13-14)하나님의 길은 찾기도 어렵고 그 길을 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더 쉬운 다른 길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인적 많은 넓은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모두 다 그러는 걸.” 하고 자기합리화를 합니다.그러나 참 생명을 찾으려면 때로는 고독한 길도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는
허영진 목사예수님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 길로 가는 사람이 많다”(마 7:14)고 말씀하셨습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이런 형편을 'Heimatlosigkeit,' 즉 '고향 상실'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에게는 돌아가야 할 고향이 있는데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독의 시인 헤르만 헤세의 ‘그 어디엔가’라는 시 가운데 이런 아름다운 구절이 있습니다. 인생의 사막을 지나전신을 불태우며 나는 헤맨다.그러나 거의 잊어버린 그 어디엔가서늘한 나무 그늘 아래꽃이 피는 동산이 있음을 나는 알고
첫 우리말 성경은 도대체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든 것일까요?1870년대 초 우리나라 북쪽의 의주 지방에는 중국을 드나드는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이응찬이란 사람이 한약재를 배에 가득 싣고 압록강을 건너다가 배가 파선되어 장사할 물건을 모두 잃고 목숨만 겨우 건졌습니다. 타국에서 오갈 데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된 이응찬을 구해준 사람이 선교사 존 로스 목사였습니다. 로스 선교사는 이응찬을 어학 선생으로 채용했습니다. 또 다른 상인 서상륜은 인삼 장사차 만주에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선교사 존 매킨타이어 목사가 치료해
허영진 목사(revhuh@gmail.com)새해를 맞이합니다. 왜 새해입니까? 왜 첫날입니까? 사실은 새해 첫날도 묵은해의 마지막 날과 꼭 같은 날입니다.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사람이 마음으로 새 결심을 하고 그 결심대로 살기를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새해라 부르고 첫날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옳은 결심을 못하고, 결심했어도 결심대로 살지 못한다면 새해도 첫날도 무의미한 말이 되고 맙니다. 어떤 책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첫째요, 마지막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찾든지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든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1-2).한 해가 저무는 세밑이면 늘 듣는 말이지만, 올해는 “다사다난(多事多難)”이란 말이 유난히도 실감납니다. 한 마디로 2021년은 특별히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한 해였습니다.그칠 줄 모르는 테러와 내전의 와중에서 쏟아지는 난민 문제로 국제사회가 몸살을 앓았습니다. 미중 간의 패권 경쟁이 격해지며 세계
한국 최초의 교회는 서울의 새문안 교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새문안 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 선교사가 서울 정동에 있는 선교사 사택에서 창립했습니다. 첫 예배를 드릴 때 참석 교인은 모두 14명이었습니다. 그중에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례를 준 사람은 한 명 뿐이었습니다. 그는 알렌 선교사의 어학 선생으로 일하면서 남몰래 신앙서적을 읽던 중 진리를 깨닫고 자원하여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노춘경(또는 노도사)이었습니다. 그 외 13명은 그 이전에 이미 세례교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언더우드 선교사는 이렇게
오늘의 한국 교회를 이룩한 선교 역사는 우리말 성경 번역 사역이 그 출발점이었습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없는 선교는 불가능합니다. 바울은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며 (...)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는 책이라”(딤후3:15,16)라고 설명한 후에 말씀 전파의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합니다.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 성경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선교가 말씀 전파라면 성경 없는 선교는 불가능합니다. 나아가 성경이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음성을 발하지 못하고 엉뚱하고 잡다한 소리만 내고 있다면, 그 교회는 병 들었거나 이미 죽어버린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나오는 소리가 참으로 크고 요란하고 화려합니다. 신문지상에 이런저런 교회의 소리들이 넘쳐납니다. 특정 요일 교포 일간지 광고의 절반이 교회 광고라는 어느 통계를 본 일도 있습니다. 그 소리가 다 하나님의 목소리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목소리가 교회를 통해 크고 화려하게 세상을 뒤덮는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입니까? 그런데 교회
허영진 목사교회는 지상나라와 하늘나라의 사귐의 장이요 시간과 영원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장벽이 무너진 자리에 서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장벽을 초월하는 기관입니다. 인종, 계급, 성, 신분 등 모든 차별을 뛰어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께서 사람과 사람 사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모든 장벽을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
한인사회에서 교회 이야기를 빼면 화제가 궁해집니다. 셋이 모여 10분 이상 이야기하면 어김없이 교회가 화제에 오르고, 목사, 장로, 집사 이야기가 나오고야 맙니다. 교회가 한인들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인구 500명에 교회가 하나 꼴이라니 교회생활의 비중을 짐작할 만도 합니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막강해졌다고 볼 수도 있습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꾸어 말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선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는 우리의 영의 눈을 뜨게 하며, 감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죄를 용납지 아니하는 공의의 하